교사 정년 퇴임한 시인 김용택
페이지 정보
작성자 풀피리™ 작성일2008-10-12 09:45 조회1,212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축담 갈라진 틈에 민들레가 용케 뿌리를 내렸다. 시인의 게으름인가. 시인이 아껴서인가.
맛을 즐기는 이에게 섬진강은 ‘재첩국과 참게탕’으로, 풍류를 아는 이에게 섬진강은 ‘산수유와 벚꽃 길’로, 문화를 사랑하는 이에게 섬진강은 ‘시인 김용택’으로 등치되곤 한다. 시인은 이제 섬진강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제 ‘그가 떠난 섬진강은 섬진강이 아니다’라는 시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야말로 김용택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어떤 시인도 그 자체로서 한 지역의 대표성을 이토록 장악한 적은 없다. 이를 두고 혀 밑에 도끼자루를 숨긴 사람들은 ‘김용택이 섬진강을 팔아먹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그가 섬진강을 팔아 먹어버렸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 강은 대체 어디로, 얼마에 팔려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전북 임실군 덕치면에 있는 시인의 고향집을 찾아 보았다.
그는 교사로서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의 아버지를 같은 자리에서 가르쳤고, 그 아이의 할아버지와는 친구였다. 그러니 자기의 친구 아들과 손자들을 한곳에서 내내 가르치며 그 자리를 지켜왔으니, 그의 시가 섬진강에서 태어나고 그곳에 머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1, 길은 있지만 문(門)은 없었다.
문(門)은 사람이 낸다. 문은 소통이 아니라 구별의 도구다. 문은 열리면 길이 되고 닫히면 벽이 된다. 문은 안과 밖을 나누고, 우리와 너희를 가르며,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시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땅에 담장을 두르고 문을 닫는다. 문의 안쪽에는 식구(食口)가 있고, 바깥쪽에는 타인(他人)이 산다. 그런데 시인의 집에는 문이 없다. 아무나 내키면 발을 들여도 된다는 신호다. 마을 입구에 시인이 심었다는 느티나무에서 집 앞 진입로를 거치면 누구나 시인의 집 마당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 시인의 집에서는 비로소 문이 달린 안방 문지방까지는 누구나 한 식구인 셈이다,
Q.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그만큼 미워하는 사람도 같이 늘기 마련인데요, 그런데 선생님에게는 왜 그 흔한 안티조차 별로 없을까요?
잘 모르겠네요, 없기야 왜 없겠어요…. 다만 근본이 시골초등학교 교사다 보니 적은 거죠. 평생 평교사로 살았으니, 뭐 출세나 다른 길을 선택하려는 것이 보이지 않았을 거고, 그러니 누가 신경을 쓰겠어요? 교장이나 뭐 그런 걸 하려 했으면 몰라도….
Q. 그래도 선생님은 보통의 시골 초등학교 교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문화 권력’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여쭤보는 건데 이제 퇴임도 하셨으니 다른 사회적인 역할을 하실 의향은 없나요?
나는 분수를 아는 사람이에요. 제 분수 안에서 행복한 사람이고, 그것을 벗어나면 스스로 불행해지는 사람이지요.
Q.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의 분수를 애써 폄훼하는 것 아닐까요? 그 동안 생각했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 더 분수에 맞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무엇이든 다른 것을 하고 싶지가 않아요. 지금이 좋고 마음이 행복한데 그걸 깰 이유가 없어요. 더구나 나는 내 역량을 잘 알고 있어서 스스로 그걸 깰 인물이 못돼요. 가르치는 아이 몇 명도 제대로 관리를 못하는데, 다른걸 해서 뭘 하겠어요?
(이 질문은 김용택 시인이 퇴임 이후 기후포럼을 비롯한 환경공부에 관심이 크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인이 비판을 넘어 참여로 나아가는 수순은 아닌지를 눙쳐서 먼저 물어 본 것이었다.)
Q. 초기 작품들 중에는 사회 모순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정신이 많이 들어 있는데요, 모순을 직접 해결하고 싶지는 않습니까?
시인의 역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역사현실에 대한 모순과 갈등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죠. 저 역시 80년대에는 격정과 참여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지요, 시를 통해 모순과 대결하려 들었어요. 하지만 내내 그럴 수는 없죠, 시인은 현재를 보는 사람이거든요.
Q. '섬진강 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라 노래할 정도로 시에는 만만찮은 긴장과 갈등이 숨어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저 ‘섬진강을 아름답게 노래한 서정시인’이라고만 부릅니다?
이곳의 원형질은 농사를 짓는 삶이죠. 이건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어요. 농민은 자연에 대한 외경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자본에 의해 훼손되었고, 처음 나는 거기에 대한 저항과 반항으로 시를 쓰고 에세이를 썼죠. 그러면서 나도 자연이 가진 생명에 대한 외경을 느끼게 되고, 그러며 점점 거대담론보다는 주변의 작은 자연을 노래하게 된 거죠. 그래서 그렇게 보이겠죠.
Q. 선생님이 노래하지 않는 ‘거대담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거대담론의 앙상하고 거친 쉰 목소리보다 일상의 삶은 다르죠. 나는 그 속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 풀잎과 나, 그리고 나와 인간과의 관계 이런 사회구조적 모순을 관찰하면서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고, 내 시에서는 이것이 더 크죠.
Q. 시인이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어느 날 시가 내게 다가왔다.’ 뭐 이런 건가요?
처음에 학교 선생이 되니까 오전수업을 하고 나면 할 일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월부 책을 사서 읽었죠. 공부는 삶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공부인데, 읽다 보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 사회가 예전과 다르게 다가와요. 새롭게 다가오는 재미를 느낀 거죠. 그래서 책을 더 보고 생각을 키웠지요. 무엇을 대충 보지 않고 자세히 보니 자꾸 생각이 커져요. 그러다 보니 그걸 정리하고 싶어졌고, 그래서 일기 편지 쪽지 형식으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그게 시가 되었어요.
Q. 시를 따로 공부한 건 아니지만, 독서의 영향으로 세상을 저절로 시인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뜻인가요?
어느 날 보니 내가 시를 쓰고 있더군요. 처음에는 이게 시일까? 의심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게 ‘시’냐고 어디 물어볼 데가 있나. 어쨌건 그때는 그냥 계속 써지더라고요. 나중에야 이게 ‘시’ 인가보다 싶어 다시 읽어보니까 감동이 ‘딱’ 생기는 거라… 시는 자기감동이 가장 중요해요. 그 후에 스스로 완성도가 있다고 생각한 시를 골라 잡지사에 보냈더니 나중에 연락이 왔어요, 시집에 실어주겠다는 거에요.
Q. 스스로 시에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잘 사는 방법은 자기가 잘 사는 길을 가는 것이겠죠. 그러고 보면 지금 이게 내가 잘 사는 길이다 싶으니, 책 읽고 글 쓰는 재주가 어디에 숨어 있었겠죠? 문학을 배운 적은 없어요, 자연에서 배웠죠, 자연은 시시때때로 주는 말이 많아요.
(논어에 ‘學而不思則岡思而不學則殆 (학이 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라는 말이 있다.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문학을 따로 배우지 않았으나, 그의 시는 위태롭지 않았다.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았을 뿐, 자연에서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Q. ‘자연이 주는 말은 어떤 말’인지요, 그것도 ‘시어’ 인가요?
음 뭐랄까, 젊을 때는 자연이 너무 많은 말을 주니까 헤맸어요. 이 시기가 자연과의 갈등 시기지. 소쩍새가 울어도 왜 우나 싶고, 물 소리가 들려도 가슴을 흔들어 버리는 그런 시기야.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연이 자연으로 돌아가고 편안해지는 시기가 오는 거야. 그냥 소쩍새는 소쩍새로, 강은 강으로 보이고 들리는 거지. 이 순간이 아마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획득한 순간이었을 거야.
(시인이 인터뷰어에게 마음을 열었다. 이제 굳이 경칭을 쓰지도 않았고 질문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사사로운 세계를 편안하게 들려주었다. 아무리 봐도 시인은 그의 시처럼 그냥 태생적인 섬진강 사람이었다.)
Q. 객관성을 얻는다는 것은 자연에 반응하는 과잉감정을 덜어내고 편안해진다는 건가요?
자연의 변화는 새소리가 새소리로 들릴 때, 안정되고 평화가 찾아오는 거지. 이때 시가 써지는 거야. 사사로움에서 벗어나야 하지. 문학적 객관성을 획득하는 거고. 소쩍새에서 누구의 죽음이 떠오르고 피 울음이 들리면 잠을 못 자.
(시인의 눈이 아이처럼 반짝였지만, 객관적인 자연의 말은커녕, 그 오버를 잘한다는 소쩍새의 피 울음도 한번 들어보지 못한 인터뷰어로서는 그저 눈만 껌뻑 거렸다.
Q. ‘섬진강 1’에 나오는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이런 구절들은 자연을 착취하는 자들에 대한 일종의 분노가 아닐까요? 선생님 시에서 분노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나는 시대적 분노는 있어도, 사사로운 분노는 없어요. 농민의 착취에 분노하고, 그 착취하는 사회구조에 분노한 것이지. 나는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의 그 아버지 어머니도 가르쳤어. 그런데 그들은 가난한 농민이었지. 희망이 없어요. 그래서 다들 서울로 갔지. 그러나 서울가면 거기서 뿌리내릴 사회기반이 없어. 거기서도 밀려나요. 그러다가 가정이 파탄나고, 아이들은 다시 고향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로 맡겨지지. 아이들을 떠맡은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내 친구 또래였지. 가난이 이렇게 대물림 되는 거야. 가난이 약속된 땅이 이런 농촌이지. 그런걸 보며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통하겠어요.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또 시인이야.
(시인은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의 부모도 가르쳤다, 그들이 졸업해서 도시로 가고, 무너지고, 그들의 아이들이 버려지다시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겨지면 그들을 다시 가르쳤다. )
Q. 그런데 선생님의 시는 비판을 하되 ‘익명비판’을 한다는 폄훼도 있어요. 예를 들면 ‘몹쓸 정치인들’ 이라고 하지 ‘몹쓸 000’ 와 같은 실명비판을 피해 서정성의 그림자 뒤에서 그저 박수만 받으려 한다는 거죠.
사사로운 비판은 시인의 몫이 아니야. 정치인들이 할 일이지. 나는 사적으로 좌·우, 진보·보수의 대립도 정권을 잡기 위해 자기주장을 하는 정치인들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해요. 시대착오적이지. 21세기적 사고는 문화·환경에 대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요구하는데, 시인의 역할은 고치고 대안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지. 거기까지가 시인의 역할이야.
Q.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통제불능이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통제를 못하는 것은 위험한 데, 파탄으로 가는 거지. 이미 위험한 길로 들어섰어. 새로운 시대정신이 도래했는데 우리만 외면하고 무시하고 짓밟고 있는 거지.
Q. 새로운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생명정신이지. 예를 들면 기후변화,생태순환, 환경지향과 같은 거예요. 세계가 그렇게 변하는데 우리는 기껏 토목공사나 하려고 들지요. 나는 우리가 뒤처지고 있다는 것을 실체적 위협으로 느껴요.
Q 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어느 시기건 항상 위기이고 두려움이고 세기말이고 절망으로 보이지 않나요? 그래서 시인은 늘 불행하고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지금 우리는 농업에서 산업화 다시 정보혁명의 시대를 거치면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어.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 거지. 지금 우리나라는 토건업에 상상의 젖줄을 대고 있어. 토건에 기댄 성장의 한계는 뻔하잖아요? 다 지으면 어떡할 거야? 더 지을 데가 없으면 그때는? 우리는 토건의 시대에 투입된 인력을 다음에는 어디로 돌리고 유용하게 써야 할까 고민했어야 해. 그건 고사하고 아직도 땅 팔 고민을 하잖아, 답답하고 두려운 거지.
징검다리에 걸터앉아 강물에 발을 담그자 김용택 시인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맑아진다. 영락없는 ‘어른아이’다.
2. 친구의 아들을 그리고 다시 그 아들과 딸을 가르치며
Q, 일생을 한 지역에서 일선 교사로 근무하다가 퇴임하셨는데, 우리의 교육은 어떻습니까?
심각한 문제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 학생·부모·교사 간의 갈등은 조절하지 못할 만큼 커지고 파탄상태지. 특히 교사집단은 자기개혁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어. 세상에 무심한 거지, 사회와 세계에 일어난 일에 가장 반응하지 않는 집단이 교사들이지. 교장중심의 교육이 교사집단을 가장 민주화가 가장 안된 후진집단으로 만든 것이고. 시키는 대로 잘하는 교사들이 교육을 맡고 있으면 교육에 처방이 없어.
Q. 교사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교육’, 그건 주입식 교육 같은 것인가요?
성과중심이지, 성적 지상이고. 창의성 교육과는 거리가 멀어. 요즘 학생들이 시험은 잘 봐. 혼자는 무지 똑똑해. 그러니 나중에 회사에서 일은 잘 할거야, 그런데 문제는 살 줄을 몰라. 인간이 없어. 더불어 살지를 못해. 그러면 인생이 없어지지. 지금 봐, 아이들이 모두 사라졌어. 전부 공부하러 가고 없어. 놀이터에도 없고 운동장에도 없고 전부 학원에만 있어.
Q, 그렇다고 섬진강 아이들처럼 그런 아이들과 달리 자라면, 그 아이들의 미래는 행복해 질까요? 경쟁에서 도태 될 게 뻔한데, 그래도 ‘행복하다, 행복하다’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가요?
그 아이들은 자기선택과는 무관하게 여기 있는 아이들이야. 사회에서 힘들겠지. 하지만 사람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서 받는 영향이 있어. 어떤 선생으로부터 받았건 나름의 영향이 잠재되어 있을 테지. 경쟁하며 힘들더라도 혹은 경쟁에서 지더라도, 감성적인 부분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 믿어.
(시인의 눈이 자꾸 하늘에 머물렀다. 친구의 손자 손녀까지 보듬고 가르쳤지만, 정작 그 아이들이 맞닥뜨릴 세상에 대해서는 그저 삶에 긍정적인 영향이 미치기를 바랄 수 밖에 없는 것이, 교사로서 시인의 한계였고 고통이었다.)
Q,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은 어떤 것일까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것이 지금 우리의 교육이죠. 독립적 인격이 아닌 독단적 인간을 만들어요. 하다못해 초등교육이라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자연을, 그리고 놀이를 주어야 하죠. 그런데 아이들이 놀 줄을 몰라. 더불어 살 줄 모른다는 거죠. 경쟁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있다는 거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놀이 교육이 필요한 거야. 초등학교까지는 이런 놀이 교육이 진짜 필요해.
Q, 놀이 교육의 부재가 지금 우리사회에서 증오가 넘치고 관대함이 사라져가는 현상을 만든 걸까요?
앞으로 그 아이들이 스물, 서른이 되는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이기적인 사회가 되겠지. 난 두렵고 겁나. 도시에서 온 아이들을 보면 공이나 다람쥐 놀이를 하면 그냥 슬쩍 따라가다가 말아. 혼자 놀아. 한데 시골아이들은 공하나 주면 하루 종일 정신 없이 같이 놀지. 이게 얼마나 시사점이 큰 것이겠어.
Q 그 동안 문단 활동 별로 안 했는데 이젠 하셔야죠?
문단은 이념적 편 가르기를 많이 해, 나는 관심이 없어. 나무 풀을 자세히 보면 죽으려는 놈, 살려는 놈이 보이잖아. 이런 눈으로 문단을 보면 진짜 쪼잔해. 내가 좋아하는 문인들이 한국작가회의에 많기는 하지만 그 동안은 나는 모임에 갈래도 갈수가 없었지. 선생이 애들 가르쳐야지 어딜 다녀? 그러니 자연히 문단에서 한 발 떨어질 수 있었고, 그게 편하더라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야, 좋은 사람 만나면 되지 뭘 만날 모여.
Q. 퇴임 뒤 갑작스레 온 변화가 두렵지 않으세요?
원하던 아니던 이젠 환경이 바뀌었지. 월요일 하루는 서울 가서 기후변화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해. 회당 3시간씩 10주 과정인데, 우선 그걸 하고 내려와서 그 다음에는 강연도 하고, 아니면 이렇게 놀지. 처음에는 갑자기 그만두면 어쩌나 싶었는데, 노니까 아주 좋아. 노는 일이야 말로 일생에서 가장 해 볼만한 일 같아, 만날 놀고 하루 공부하고.
(이어지는 시인의 몸짓이 아이처럼 순박했다. 권혁재 기자가 이 순간을 잘 잡았을까. 초조함이 들 정도로 시인의 웃음과 몸짓이 깨끗하고 맑았다.)
Q. 앞으로는 기후문제, 넓게는 환경문제에 매진하실 작정인가요?
그건 아니야, 그냥 좋아서 하는 거야. 누가 ‘저 친구도 운동하러 나서려나’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공부해보니 아주 재미있어.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이렇게 공부만 하는 거지.
Q. 그럼 공부와 강연 말고는 만날 노세요? 뭐하고 노시는데요?
뭐 요새도 8시에 자고 4시에 일어나는데 운동하고 신문보고 뒷산에 갔다 오면 오전이 후딱 가. 나는 신문을 아주 열심히 읽거든. 나는 신문 안 읽는 사람은 상종하기 싫어. 신문을 안보고 공무원이나 교사하면 일을 잘 못해요. 이슈를 모르니 말이에요. 신문을 안보니 시골 작은 동네 공무원들도, 어떡하면 땅이나 뒤집어 팔까? 어디 콘크리트 깔아서 관광지나 만들어 볼까 그런 궁리를 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하루에 몇 시간씩 신문 읽고 책 읽고 놀아.
Q. 당연하겠지만 섬진강, 넓게는 자연을 개발하는 일에는 부정적이시죠?
아유 지겨워! 정말 말도 못하지, 행정광역화 그거 빨리 해야 해요. 도는 없애고 큰 시로 묶어야 해. 좋은 생각 있고 능력 있는 공무원들 좀 들어오게. 개발을 무조건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큰 그림을 그려야지. 작은 행정단위로 가니까 서로 자기구역 뒤집으려고만 하잖아요. 큰 틀에서 보존할 것과 개발할 걸 나눠야지 면 단위에서 다 파면 어떻게 해?
Q. 개발을 반대해도 무조건 반대한다는 건 아니군요?
나는 반대지, 물론. 국토연구원 그것도 엉큼하더라고. 국토개발연구원에서 ‘개발’을 슬쩍 뺀 거거든. 하지만 개발을 하더라도 그 계획에 저 느티나무, 바위 실개천이 다 들어가 있어야지, 전부 팔 생각부터 해. 그걸 반대하려면 개발 찬성하는 이웃하고, 군청 공무원하고 척을 질 각오를 해야 해. 아주 지겨워요. 그런데 요샌 전화해서 물어는 봐요. 그런데 묻기만 해.
(마을입구에 거의 오백 년은 묵었을 만한 엄청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한데 그 나무는 시인이 스무 살 때 심은 것이라고 했다. 시인은 자연에는 각각의 역사가 있다고 했다. 그것을 그냥 지우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어느새 우리 땅은 거대한 시멘트더미들이 역사를 지우는 지우개가 되어 세상을 뒤덮고 있다.)
3. 오리농사에서 섬진강 시인으로.
Q. 원래는 농고 졸업 후에 농사를 지으려 하셨다면서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에는 오리농사를 지었지. 68년에 당시 돈 10만원을 융자를 받아서 집 3칸을 짓고 오리 100마리 사서 농사를 지었어. 아 그런데 그 놈들이 너무 잘 크더라고. 사료에, 싱싱한 풀에, 사방이 다슬기, 개구리인데, 뭐 쑥쑥 크는 거지. 다른 사람이 키우던 오리를 200마리 인수까지 했어. 그런데 오리가 말이야. 허허, 나 참, 이게 아주 소집단주의적인 놈들이야. 이놈들이 자기구역이 딱 있는 거라. 지들이 먹을게 없으면 아주 멀리까지 가요. 한 십 리씩은 예사로 가. 그런데 이놈들이 갈 때 돌아올 시간을 계산을 안하고 가니까. 밤이 되어버리면 영 안 돌아와. 그래서 쫄딱 망했지 뭐.
Q. 파산 한 셈이네요?
어머니 보고 남은 오리 좀 팔아 달라고 하고 서울로 도망갔지 뭐. 친척집 돌아가며 밥 얻어 먹는데, 한 달 지나니 갈 데가 있어야지. 나중에는 택시 운전을 배우려고 아버지보고 3만원만 보내달라고 했더니 안되다고 딱 잘라, 그러다가 영 거지꼴이 되었지 뭐. 그때 그걸 본 친척이 아버지한테 전화했어. 용택이가 서울에서 거지가 돼서 돌아다닌다고. 아버지가 연락이 왔어. 고향에 취직자리가 생겼다고. 그런데 가보니 거짓말이야. 어쨌건 그렇게 다시 내려와서 농사나 할까 하는데 친구들이 교사임용시험 치러가자고 하더라고, 교사가 모자라서 고등학교 나와도 시험만 합격하면 된다고, 시험에 합격해서 선생이 되었지.
Q. 그때 교사가 안 되었으면, 그래도 시를 쓰고 행복했을까요?
음, 농사를 지었겠지 뭐. 그래도 열심히 살았을 거야. 난, 심심하면 못살고, 뭔가 열심히 해야 해. 대신 시는 못 썼을 테지. 하여간 나는 개인적으로 다른 욕심은 없지만, 한가지 그냥 행복해야 하는 거야.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뭘 하지 않았겠어?
Q. 어떤 마음으로 시를 씁니까. 시상이 그냥 ‘딱’하고 떠오를 때만 시를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쓰겠다고 생각하고 쓰면 말장난이지. 시란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형식으로 가져온 것이거든. 안 살아보면 쓸 수가 없어. 안 살아보고도 아주 시를 척척 쓰는 시인을 보면 신기해. 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 현상을 종합한 내용을 시의 형식으로 형상화 해낼 따름이거든.
Q 그럼 시인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면을 보고, 그것을 시를 통해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가요?
시는 세상을 종합하는 일이고, 시인이 시를 배우는 일이 세상을 배우는 일이에요. 시인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해석하지. 세상이 썩어도 시만 정신을 차리면 세상은 안 썩어. 그래서 시인이 현상을 제시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하는 게 가능하지. 그러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시인의 역할이 아니야. 철학자나 정치가가 할 일이지. 그런데 시인까지 안 본 것을 가지고 시를 쓰고, 시인이 대안을 내세우기 시작 하고…. 그러고 다니면 큰일 나.
Q.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시'를 멀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아니 사실은 우리나라처럼 시가 상업화 된 나라도 없어. 김수영 말대로 시는 ‘불온하고 혁명적인 것’ 이거든. 시인은 실패한 혁명가고, 실패해도 아름다운 건 시인뿐이야. 그러니 그게 상업화 되기가 어렵지. 다른 나라는 시집을 그저 몇 부 찍어서 돌려보고 해. 우리나라처럼 시집이 수십만 부 팔리고 베스트셀러 되는 나라는 그리 없어. 이유가 뭐겠어?
Q, 그 말에서 선생님 시에 대한 도덕적 정결성이 강하게 느껴지는데요?
음, 반성이지. 시인의 사명으로, 혹은 시인의 자세로 반성하는 거지. 시인은 몸을 낮추는 겸손도 필요하고. 또 나에 대한 기대와 바람에 겸손하고, 우리시대와 어떻게 만나느냐, 어떻게 호소력을 가지느냐를 고민해야지, (시인은 ‘내 농사는 논 밖에서 풍년이고, 논 안에서 흉년입니다..’ 라며 처절한 자기반성을 노래했다. 결벽에 가까운 이러한 자기비판은 그의 시를 더욱 도덕적 정결의 바탕 위에 서게 한다.)
Q. 앞으로 어떤 시를 쓰시고 싶으세요?
늘 폭넓고 불편한 진실을 담은 시를 쓰고 싶어요. 진실은 늘 불편하죠. 시대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 이거든. 예를 들어 자연을 건드리는 일을 보자면. 사람은 늘 자연을 건드리고 싶어하죠. 하지만 그건 자연을 죽이는 일이거든. 결국은 인간을 죽이는 일이고. 인간이 거칠고 광폭한 것은 자연을 죽인 탓이지. 시인은 이런 불편한 진실을 건드리는 것이지. 그러면 건설하고 땅 파는 분들은 나를 얼마나 불편해 하겠어.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쓰고 싶어요.
Q, 일각에서는 선생님이, 오히려 섬진강 사람들과, 섬진강을 미화해서 상품으로 포장했다고 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초기에는 민중의 고통을 노래했지. 하지만 지금까지도 계속 그럴 수만은 없잖아. 고통 속에 아름다운 서정이 있고, 그것을 또 드러내야 할 시인의 의무가 있는데. 섬진강 민중은 고난의 민중이라는 시만 쓸 수는 없지. 섬진강은 오히려 우리가 잃어버린 원형을 닮고 있거든.
Q. 요즘 사회적으로 불행한 죽음들이 많습니다. 시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칩니까?
자기가 사는 삶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지나친 우월감을 갖는 데서 비극이 시작되죠. 보통 ‘무리하다’는 말, ‘지나치다’는 말은 곧 자기만을 생각한다는 뜻이거든. 무리한 것은 곧 지나침이에요.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늘 자신을 가다듬고 고쳐가는 것이 중요하지. 일상을 가까이 하지 못하면 삶이 사라져. 그걸 잃은 거지.
Q. 요사이는 고향집을 떠나 전주에서 사신다는데, 그럴 이유가 있으시나요?
여기는 사람들이 느닷없이 찾아와서 내 생활이 없어. 일 년에 2000~3000명 씩 문학기행을 오는데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이야기하고 맞이해야지, 다들 내 손님인데. 아내가 밥하느라 아주 곤욕을 치러. 그래도 다 좋은데 글 쓰고 책을 읽을 수 없어. 동네사람들에게도 너무 폐가되고. 내가 봉착한 가장 큰 문제였지. 그래서 집을 옮겼는데, 이제 퇴임했으니, 다시 돌아올까 생각 중이야. 지금 어머니가 사시는 이 집 뒤에 새로 작은 집을 하나 달아내든지 하려고 해.
(짚 앞의 강가 징검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멀리선 온 듯한 한 쌍의 젊은이가 멀리서 시인에게 인사를 하며 카메라를 꺼내 들었고, 시인은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아이처럼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Q. 천직이 된 교사도 처음에는 적성이 아니셨다면서요?
교사 한 달하니까 아이들하고 노는 게 죽을 맛이더라고요. 젊을 때 얼마나 갑갑하던지.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부터 세상 보는 눈이 떠지더군요.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내 존재를 생각하게 되고, 그러니 아이들이 좋아졌어요. 애들은 살아 있고, 정신적으로 역동적이에요. 그런 새로움을 보고 생각하죠. 그걸 보고 배우고. 그래서 나는 늘 현실주의자이고 지금을 중시하죠. 아이들 눈빛 동심을 보면 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요. 그러면 교사가 아주 재미가 나요. 교육을 통해 나를 교육하는 거지.
Q. 교사로서의 재미는 가르치는 게 아니라 배우는 거라는 말이군요?
그러면 진심이 통하거든, 그런데 세상은 그게 안 통해. 아이들은 내가 진실한 만큼 진실하죠. 어떤 때는 아이들 노는 게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 없어. 뛰어 놀 공간만 있으면 놀지, 행복한 거야. 지극히 그 순간은, 그걸 보며 밖을 향한 내 욕망이 사그라들어요. 어른들은 이해관계로 늘 이합집산 하지만 아이들은 진실하거든. 그걸 가리키며 내가 배우지.
Q. 산문을 쓰실 계획은 없습니까?
아, 그건 이미 좀 써둔 게 있어요. 한 3권 준비했지. 올 12월과 내년 봄쯤에 낼까 싶어요. 하나는 ‘아이들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라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마침내 그렇게 된 나의 인생’이라는 책이에요.
Q. 선생님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누구였어요?
아무래도 어머니죠. 어머니가 얘기를 잘하셨지. 이를테면 ‘아이들은 싸워야 큰다’ 이런 말. 아주 아름다운 말이거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마찰하고, 그 마찰이 해결되는 과정을 배우는 거잖아. 그걸 통해 이해하고 배우는 거지. 또 ‘우리집 개를 내가 예뻐해야지 남이 예뻐한다’ 이런 말도 철학적 이잖아, 그렇죠?
(보통 사람들이 안경을 쓰면 시인의 눈에는 돋보기와 현미경이 걸린다고 한다. 같은 말도 이렇게 해석하는 시인에게는 세상 모두가 스승일 터이다.)
Q. 어떤 작가를 좋아하세요?
다 좋아하지. 하지만 김수영 시인을 좋아해. 인간적으로 볼 때 그의 시는 치열한 일상과 삶을 담고 있어요.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시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자세를 유지했어. 아직도 우리에게 살아 있는 시인인데. 정말 생명력이 있지. 근본적으로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혁명이거든. 그래서 시인은 인간의 거짓투성이, 고루한 삶을 못 견디고 돌아버리는 거지. 김수영 시인이 그랬어.
Q. 오늘의 선생님을 만든 것은 독서의 힘인데, 선생님에게 독서의 의미입니까?
요즘은 독서하는 사람이 드물어. 독서를 잃어버린 시대지, 특히 대학생들이 책을 놔 버렸어. 하지만 나중에는 책을 읽는 사람만 살아 남을 거야, 책은 정신작용에 영향을 미쳐서 새로운 것을 찾도록 충동질 하거든. 그러면 사람이 변하지. 독서로 정신이 풍요로우면 당당하고 자신만만해져. 비루해지거나 저 자세일 필요가 없지. 누구에게나 말이야.
마치며
‘오! 내게 와서 꽃처럼 피어나는 아이들. 아이들은 나무처럼 자랐다. 세상에 태어나 아이들의 곁에 있게 된 것은 내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감출 수 없는 내 생의 축복이었고, 여한이 없는 날들이었다. 많은 분들의 분에 넘치는 관심과 인정이 나와 아이들에게 햇살처럼 쏟아졌다. 그 사랑이, 그 믿음이, 그 인정이 나를 나무의 새잎처럼 세상으로 밀어 올린다…- 김용택 시집 『나무』중에서
그는 스스로 쓴 이 ‘시인의 말’처럼 행복한 사람이다.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사는 것’ 이라는 로뎅의 말처럼 ‘그는 마음 머물고 눈길 가는 지금, 저곳이, 실감나는 나의 현실이라’고 믿으며 그것을 노래했고 딱 그 노래만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내일도 그곳에 그렇게 있을 터이고 우리 중에 또 누군가는 다시 그곳으로 시인을 찾아 나설 것이다.
박경철 (donodonsu@naver.com),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맛을 즐기는 이에게 섬진강은 ‘재첩국과 참게탕’으로, 풍류를 아는 이에게 섬진강은 ‘산수유와 벚꽃 길’로, 문화를 사랑하는 이에게 섬진강은 ‘시인 김용택’으로 등치되곤 한다. 시인은 이제 섬진강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제 ‘그가 떠난 섬진강은 섬진강이 아니다’라는 시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야말로 김용택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어떤 시인도 그 자체로서 한 지역의 대표성을 이토록 장악한 적은 없다. 이를 두고 혀 밑에 도끼자루를 숨긴 사람들은 ‘김용택이 섬진강을 팔아먹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그가 섬진강을 팔아 먹어버렸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 강은 대체 어디로, 얼마에 팔려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전북 임실군 덕치면에 있는 시인의 고향집을 찾아 보았다.
그는 교사로서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의 아버지를 같은 자리에서 가르쳤고, 그 아이의 할아버지와는 친구였다. 그러니 자기의 친구 아들과 손자들을 한곳에서 내내 가르치며 그 자리를 지켜왔으니, 그의 시가 섬진강에서 태어나고 그곳에 머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1, 길은 있지만 문(門)은 없었다.
문(門)은 사람이 낸다. 문은 소통이 아니라 구별의 도구다. 문은 열리면 길이 되고 닫히면 벽이 된다. 문은 안과 밖을 나누고, 우리와 너희를 가르며,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시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땅에 담장을 두르고 문을 닫는다. 문의 안쪽에는 식구(食口)가 있고, 바깥쪽에는 타인(他人)이 산다. 그런데 시인의 집에는 문이 없다. 아무나 내키면 발을 들여도 된다는 신호다. 마을 입구에 시인이 심었다는 느티나무에서 집 앞 진입로를 거치면 누구나 시인의 집 마당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 시인의 집에서는 비로소 문이 달린 안방 문지방까지는 누구나 한 식구인 셈이다,
Q.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그만큼 미워하는 사람도 같이 늘기 마련인데요, 그런데 선생님에게는 왜 그 흔한 안티조차 별로 없을까요?
잘 모르겠네요, 없기야 왜 없겠어요…. 다만 근본이 시골초등학교 교사다 보니 적은 거죠. 평생 평교사로 살았으니, 뭐 출세나 다른 길을 선택하려는 것이 보이지 않았을 거고, 그러니 누가 신경을 쓰겠어요? 교장이나 뭐 그런 걸 하려 했으면 몰라도….
Q. 그래도 선생님은 보통의 시골 초등학교 교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문화 권력’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여쭤보는 건데 이제 퇴임도 하셨으니 다른 사회적인 역할을 하실 의향은 없나요?
나는 분수를 아는 사람이에요. 제 분수 안에서 행복한 사람이고, 그것을 벗어나면 스스로 불행해지는 사람이지요.
Q.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의 분수를 애써 폄훼하는 것 아닐까요? 그 동안 생각했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 더 분수에 맞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무엇이든 다른 것을 하고 싶지가 않아요. 지금이 좋고 마음이 행복한데 그걸 깰 이유가 없어요. 더구나 나는 내 역량을 잘 알고 있어서 스스로 그걸 깰 인물이 못돼요. 가르치는 아이 몇 명도 제대로 관리를 못하는데, 다른걸 해서 뭘 하겠어요?
(이 질문은 김용택 시인이 퇴임 이후 기후포럼을 비롯한 환경공부에 관심이 크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인이 비판을 넘어 참여로 나아가는 수순은 아닌지를 눙쳐서 먼저 물어 본 것이었다.)
Q. 초기 작품들 중에는 사회 모순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정신이 많이 들어 있는데요, 모순을 직접 해결하고 싶지는 않습니까?
시인의 역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역사현실에 대한 모순과 갈등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죠. 저 역시 80년대에는 격정과 참여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지요, 시를 통해 모순과 대결하려 들었어요. 하지만 내내 그럴 수는 없죠, 시인은 현재를 보는 사람이거든요.
Q. '섬진강 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라 노래할 정도로 시에는 만만찮은 긴장과 갈등이 숨어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저 ‘섬진강을 아름답게 노래한 서정시인’이라고만 부릅니다?
이곳의 원형질은 농사를 짓는 삶이죠. 이건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어요. 농민은 자연에 대한 외경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자본에 의해 훼손되었고, 처음 나는 거기에 대한 저항과 반항으로 시를 쓰고 에세이를 썼죠. 그러면서 나도 자연이 가진 생명에 대한 외경을 느끼게 되고, 그러며 점점 거대담론보다는 주변의 작은 자연을 노래하게 된 거죠. 그래서 그렇게 보이겠죠.
Q. 선생님이 노래하지 않는 ‘거대담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거대담론의 앙상하고 거친 쉰 목소리보다 일상의 삶은 다르죠. 나는 그 속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 풀잎과 나, 그리고 나와 인간과의 관계 이런 사회구조적 모순을 관찰하면서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고, 내 시에서는 이것이 더 크죠.
Q. 시인이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어느 날 시가 내게 다가왔다.’ 뭐 이런 건가요?
처음에 학교 선생이 되니까 오전수업을 하고 나면 할 일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월부 책을 사서 읽었죠. 공부는 삶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공부인데, 읽다 보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 사회가 예전과 다르게 다가와요. 새롭게 다가오는 재미를 느낀 거죠. 그래서 책을 더 보고 생각을 키웠지요. 무엇을 대충 보지 않고 자세히 보니 자꾸 생각이 커져요. 그러다 보니 그걸 정리하고 싶어졌고, 그래서 일기 편지 쪽지 형식으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그게 시가 되었어요.
Q. 시를 따로 공부한 건 아니지만, 독서의 영향으로 세상을 저절로 시인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뜻인가요?
어느 날 보니 내가 시를 쓰고 있더군요. 처음에는 이게 시일까? 의심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게 ‘시’냐고 어디 물어볼 데가 있나. 어쨌건 그때는 그냥 계속 써지더라고요. 나중에야 이게 ‘시’ 인가보다 싶어 다시 읽어보니까 감동이 ‘딱’ 생기는 거라… 시는 자기감동이 가장 중요해요. 그 후에 스스로 완성도가 있다고 생각한 시를 골라 잡지사에 보냈더니 나중에 연락이 왔어요, 시집에 실어주겠다는 거에요.
Q. 스스로 시에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잘 사는 방법은 자기가 잘 사는 길을 가는 것이겠죠. 그러고 보면 지금 이게 내가 잘 사는 길이다 싶으니, 책 읽고 글 쓰는 재주가 어디에 숨어 있었겠죠? 문학을 배운 적은 없어요, 자연에서 배웠죠, 자연은 시시때때로 주는 말이 많아요.
(논어에 ‘學而不思則岡思而不學則殆 (학이 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라는 말이 있다.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문학을 따로 배우지 않았으나, 그의 시는 위태롭지 않았다.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았을 뿐, 자연에서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Q. ‘자연이 주는 말은 어떤 말’인지요, 그것도 ‘시어’ 인가요?
음 뭐랄까, 젊을 때는 자연이 너무 많은 말을 주니까 헤맸어요. 이 시기가 자연과의 갈등 시기지. 소쩍새가 울어도 왜 우나 싶고, 물 소리가 들려도 가슴을 흔들어 버리는 그런 시기야.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연이 자연으로 돌아가고 편안해지는 시기가 오는 거야. 그냥 소쩍새는 소쩍새로, 강은 강으로 보이고 들리는 거지. 이 순간이 아마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획득한 순간이었을 거야.
(시인이 인터뷰어에게 마음을 열었다. 이제 굳이 경칭을 쓰지도 않았고 질문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사사로운 세계를 편안하게 들려주었다. 아무리 봐도 시인은 그의 시처럼 그냥 태생적인 섬진강 사람이었다.)
Q. 객관성을 얻는다는 것은 자연에 반응하는 과잉감정을 덜어내고 편안해진다는 건가요?
자연의 변화는 새소리가 새소리로 들릴 때, 안정되고 평화가 찾아오는 거지. 이때 시가 써지는 거야. 사사로움에서 벗어나야 하지. 문학적 객관성을 획득하는 거고. 소쩍새에서 누구의 죽음이 떠오르고 피 울음이 들리면 잠을 못 자.
(시인의 눈이 아이처럼 반짝였지만, 객관적인 자연의 말은커녕, 그 오버를 잘한다는 소쩍새의 피 울음도 한번 들어보지 못한 인터뷰어로서는 그저 눈만 껌뻑 거렸다.
Q. ‘섬진강 1’에 나오는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이런 구절들은 자연을 착취하는 자들에 대한 일종의 분노가 아닐까요? 선생님 시에서 분노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나는 시대적 분노는 있어도, 사사로운 분노는 없어요. 농민의 착취에 분노하고, 그 착취하는 사회구조에 분노한 것이지. 나는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의 그 아버지 어머니도 가르쳤어. 그런데 그들은 가난한 농민이었지. 희망이 없어요. 그래서 다들 서울로 갔지. 그러나 서울가면 거기서 뿌리내릴 사회기반이 없어. 거기서도 밀려나요. 그러다가 가정이 파탄나고, 아이들은 다시 고향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로 맡겨지지. 아이들을 떠맡은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내 친구 또래였지. 가난이 이렇게 대물림 되는 거야. 가난이 약속된 땅이 이런 농촌이지. 그런걸 보며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통하겠어요.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또 시인이야.
(시인은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의 부모도 가르쳤다, 그들이 졸업해서 도시로 가고, 무너지고, 그들의 아이들이 버려지다시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겨지면 그들을 다시 가르쳤다. )
Q. 그런데 선생님의 시는 비판을 하되 ‘익명비판’을 한다는 폄훼도 있어요. 예를 들면 ‘몹쓸 정치인들’ 이라고 하지 ‘몹쓸 000’ 와 같은 실명비판을 피해 서정성의 그림자 뒤에서 그저 박수만 받으려 한다는 거죠.
사사로운 비판은 시인의 몫이 아니야. 정치인들이 할 일이지. 나는 사적으로 좌·우, 진보·보수의 대립도 정권을 잡기 위해 자기주장을 하는 정치인들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해요. 시대착오적이지. 21세기적 사고는 문화·환경에 대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요구하는데, 시인의 역할은 고치고 대안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지. 거기까지가 시인의 역할이야.
Q.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통제불능이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통제를 못하는 것은 위험한 데, 파탄으로 가는 거지. 이미 위험한 길로 들어섰어. 새로운 시대정신이 도래했는데 우리만 외면하고 무시하고 짓밟고 있는 거지.
Q. 새로운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생명정신이지. 예를 들면 기후변화,생태순환, 환경지향과 같은 거예요. 세계가 그렇게 변하는데 우리는 기껏 토목공사나 하려고 들지요. 나는 우리가 뒤처지고 있다는 것을 실체적 위협으로 느껴요.
Q 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어느 시기건 항상 위기이고 두려움이고 세기말이고 절망으로 보이지 않나요? 그래서 시인은 늘 불행하고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지금 우리는 농업에서 산업화 다시 정보혁명의 시대를 거치면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어.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 거지. 지금 우리나라는 토건업에 상상의 젖줄을 대고 있어. 토건에 기댄 성장의 한계는 뻔하잖아요? 다 지으면 어떡할 거야? 더 지을 데가 없으면 그때는? 우리는 토건의 시대에 투입된 인력을 다음에는 어디로 돌리고 유용하게 써야 할까 고민했어야 해. 그건 고사하고 아직도 땅 팔 고민을 하잖아, 답답하고 두려운 거지.
징검다리에 걸터앉아 강물에 발을 담그자 김용택 시인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맑아진다. 영락없는 ‘어른아이’다.
2. 친구의 아들을 그리고 다시 그 아들과 딸을 가르치며
Q, 일생을 한 지역에서 일선 교사로 근무하다가 퇴임하셨는데, 우리의 교육은 어떻습니까?
심각한 문제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 학생·부모·교사 간의 갈등은 조절하지 못할 만큼 커지고 파탄상태지. 특히 교사집단은 자기개혁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어. 세상에 무심한 거지, 사회와 세계에 일어난 일에 가장 반응하지 않는 집단이 교사들이지. 교장중심의 교육이 교사집단을 가장 민주화가 가장 안된 후진집단으로 만든 것이고. 시키는 대로 잘하는 교사들이 교육을 맡고 있으면 교육에 처방이 없어.
Q. 교사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교육’, 그건 주입식 교육 같은 것인가요?
성과중심이지, 성적 지상이고. 창의성 교육과는 거리가 멀어. 요즘 학생들이 시험은 잘 봐. 혼자는 무지 똑똑해. 그러니 나중에 회사에서 일은 잘 할거야, 그런데 문제는 살 줄을 몰라. 인간이 없어. 더불어 살지를 못해. 그러면 인생이 없어지지. 지금 봐, 아이들이 모두 사라졌어. 전부 공부하러 가고 없어. 놀이터에도 없고 운동장에도 없고 전부 학원에만 있어.
Q, 그렇다고 섬진강 아이들처럼 그런 아이들과 달리 자라면, 그 아이들의 미래는 행복해 질까요? 경쟁에서 도태 될 게 뻔한데, 그래도 ‘행복하다, 행복하다’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가요?
그 아이들은 자기선택과는 무관하게 여기 있는 아이들이야. 사회에서 힘들겠지. 하지만 사람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서 받는 영향이 있어. 어떤 선생으로부터 받았건 나름의 영향이 잠재되어 있을 테지. 경쟁하며 힘들더라도 혹은 경쟁에서 지더라도, 감성적인 부분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 믿어.
(시인의 눈이 자꾸 하늘에 머물렀다. 친구의 손자 손녀까지 보듬고 가르쳤지만, 정작 그 아이들이 맞닥뜨릴 세상에 대해서는 그저 삶에 긍정적인 영향이 미치기를 바랄 수 밖에 없는 것이, 교사로서 시인의 한계였고 고통이었다.)
Q,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은 어떤 것일까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것이 지금 우리의 교육이죠. 독립적 인격이 아닌 독단적 인간을 만들어요. 하다못해 초등교육이라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자연을, 그리고 놀이를 주어야 하죠. 그런데 아이들이 놀 줄을 몰라. 더불어 살 줄 모른다는 거죠. 경쟁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있다는 거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놀이 교육이 필요한 거야. 초등학교까지는 이런 놀이 교육이 진짜 필요해.
Q, 놀이 교육의 부재가 지금 우리사회에서 증오가 넘치고 관대함이 사라져가는 현상을 만든 걸까요?
앞으로 그 아이들이 스물, 서른이 되는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이기적인 사회가 되겠지. 난 두렵고 겁나. 도시에서 온 아이들을 보면 공이나 다람쥐 놀이를 하면 그냥 슬쩍 따라가다가 말아. 혼자 놀아. 한데 시골아이들은 공하나 주면 하루 종일 정신 없이 같이 놀지. 이게 얼마나 시사점이 큰 것이겠어.
Q 그 동안 문단 활동 별로 안 했는데 이젠 하셔야죠?
문단은 이념적 편 가르기를 많이 해, 나는 관심이 없어. 나무 풀을 자세히 보면 죽으려는 놈, 살려는 놈이 보이잖아. 이런 눈으로 문단을 보면 진짜 쪼잔해. 내가 좋아하는 문인들이 한국작가회의에 많기는 하지만 그 동안은 나는 모임에 갈래도 갈수가 없었지. 선생이 애들 가르쳐야지 어딜 다녀? 그러니 자연히 문단에서 한 발 떨어질 수 있었고, 그게 편하더라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야, 좋은 사람 만나면 되지 뭘 만날 모여.
Q. 퇴임 뒤 갑작스레 온 변화가 두렵지 않으세요?
원하던 아니던 이젠 환경이 바뀌었지. 월요일 하루는 서울 가서 기후변화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해. 회당 3시간씩 10주 과정인데, 우선 그걸 하고 내려와서 그 다음에는 강연도 하고, 아니면 이렇게 놀지. 처음에는 갑자기 그만두면 어쩌나 싶었는데, 노니까 아주 좋아. 노는 일이야 말로 일생에서 가장 해 볼만한 일 같아, 만날 놀고 하루 공부하고.
(이어지는 시인의 몸짓이 아이처럼 순박했다. 권혁재 기자가 이 순간을 잘 잡았을까. 초조함이 들 정도로 시인의 웃음과 몸짓이 깨끗하고 맑았다.)
Q. 앞으로는 기후문제, 넓게는 환경문제에 매진하실 작정인가요?
그건 아니야, 그냥 좋아서 하는 거야. 누가 ‘저 친구도 운동하러 나서려나’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공부해보니 아주 재미있어.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이렇게 공부만 하는 거지.
Q. 그럼 공부와 강연 말고는 만날 노세요? 뭐하고 노시는데요?
뭐 요새도 8시에 자고 4시에 일어나는데 운동하고 신문보고 뒷산에 갔다 오면 오전이 후딱 가. 나는 신문을 아주 열심히 읽거든. 나는 신문 안 읽는 사람은 상종하기 싫어. 신문을 안보고 공무원이나 교사하면 일을 잘 못해요. 이슈를 모르니 말이에요. 신문을 안보니 시골 작은 동네 공무원들도, 어떡하면 땅이나 뒤집어 팔까? 어디 콘크리트 깔아서 관광지나 만들어 볼까 그런 궁리를 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하루에 몇 시간씩 신문 읽고 책 읽고 놀아.
Q. 당연하겠지만 섬진강, 넓게는 자연을 개발하는 일에는 부정적이시죠?
아유 지겨워! 정말 말도 못하지, 행정광역화 그거 빨리 해야 해요. 도는 없애고 큰 시로 묶어야 해. 좋은 생각 있고 능력 있는 공무원들 좀 들어오게. 개발을 무조건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큰 그림을 그려야지. 작은 행정단위로 가니까 서로 자기구역 뒤집으려고만 하잖아요. 큰 틀에서 보존할 것과 개발할 걸 나눠야지 면 단위에서 다 파면 어떻게 해?
Q. 개발을 반대해도 무조건 반대한다는 건 아니군요?
나는 반대지, 물론. 국토연구원 그것도 엉큼하더라고. 국토개발연구원에서 ‘개발’을 슬쩍 뺀 거거든. 하지만 개발을 하더라도 그 계획에 저 느티나무, 바위 실개천이 다 들어가 있어야지, 전부 팔 생각부터 해. 그걸 반대하려면 개발 찬성하는 이웃하고, 군청 공무원하고 척을 질 각오를 해야 해. 아주 지겨워요. 그런데 요샌 전화해서 물어는 봐요. 그런데 묻기만 해.
(마을입구에 거의 오백 년은 묵었을 만한 엄청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한데 그 나무는 시인이 스무 살 때 심은 것이라고 했다. 시인은 자연에는 각각의 역사가 있다고 했다. 그것을 그냥 지우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어느새 우리 땅은 거대한 시멘트더미들이 역사를 지우는 지우개가 되어 세상을 뒤덮고 있다.)
3. 오리농사에서 섬진강 시인으로.
Q. 원래는 농고 졸업 후에 농사를 지으려 하셨다면서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에는 오리농사를 지었지. 68년에 당시 돈 10만원을 융자를 받아서 집 3칸을 짓고 오리 100마리 사서 농사를 지었어. 아 그런데 그 놈들이 너무 잘 크더라고. 사료에, 싱싱한 풀에, 사방이 다슬기, 개구리인데, 뭐 쑥쑥 크는 거지. 다른 사람이 키우던 오리를 200마리 인수까지 했어. 그런데 오리가 말이야. 허허, 나 참, 이게 아주 소집단주의적인 놈들이야. 이놈들이 자기구역이 딱 있는 거라. 지들이 먹을게 없으면 아주 멀리까지 가요. 한 십 리씩은 예사로 가. 그런데 이놈들이 갈 때 돌아올 시간을 계산을 안하고 가니까. 밤이 되어버리면 영 안 돌아와. 그래서 쫄딱 망했지 뭐.
Q. 파산 한 셈이네요?
어머니 보고 남은 오리 좀 팔아 달라고 하고 서울로 도망갔지 뭐. 친척집 돌아가며 밥 얻어 먹는데, 한 달 지나니 갈 데가 있어야지. 나중에는 택시 운전을 배우려고 아버지보고 3만원만 보내달라고 했더니 안되다고 딱 잘라, 그러다가 영 거지꼴이 되었지 뭐. 그때 그걸 본 친척이 아버지한테 전화했어. 용택이가 서울에서 거지가 돼서 돌아다닌다고. 아버지가 연락이 왔어. 고향에 취직자리가 생겼다고. 그런데 가보니 거짓말이야. 어쨌건 그렇게 다시 내려와서 농사나 할까 하는데 친구들이 교사임용시험 치러가자고 하더라고, 교사가 모자라서 고등학교 나와도 시험만 합격하면 된다고, 시험에 합격해서 선생이 되었지.
Q. 그때 교사가 안 되었으면, 그래도 시를 쓰고 행복했을까요?
음, 농사를 지었겠지 뭐. 그래도 열심히 살았을 거야. 난, 심심하면 못살고, 뭔가 열심히 해야 해. 대신 시는 못 썼을 테지. 하여간 나는 개인적으로 다른 욕심은 없지만, 한가지 그냥 행복해야 하는 거야.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뭘 하지 않았겠어?
Q. 어떤 마음으로 시를 씁니까. 시상이 그냥 ‘딱’하고 떠오를 때만 시를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쓰겠다고 생각하고 쓰면 말장난이지. 시란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형식으로 가져온 것이거든. 안 살아보면 쓸 수가 없어. 안 살아보고도 아주 시를 척척 쓰는 시인을 보면 신기해. 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 현상을 종합한 내용을 시의 형식으로 형상화 해낼 따름이거든.
Q 그럼 시인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면을 보고, 그것을 시를 통해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가요?
시는 세상을 종합하는 일이고, 시인이 시를 배우는 일이 세상을 배우는 일이에요. 시인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해석하지. 세상이 썩어도 시만 정신을 차리면 세상은 안 썩어. 그래서 시인이 현상을 제시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하는 게 가능하지. 그러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시인의 역할이 아니야. 철학자나 정치가가 할 일이지. 그런데 시인까지 안 본 것을 가지고 시를 쓰고, 시인이 대안을 내세우기 시작 하고…. 그러고 다니면 큰일 나.
Q.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시'를 멀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아니 사실은 우리나라처럼 시가 상업화 된 나라도 없어. 김수영 말대로 시는 ‘불온하고 혁명적인 것’ 이거든. 시인은 실패한 혁명가고, 실패해도 아름다운 건 시인뿐이야. 그러니 그게 상업화 되기가 어렵지. 다른 나라는 시집을 그저 몇 부 찍어서 돌려보고 해. 우리나라처럼 시집이 수십만 부 팔리고 베스트셀러 되는 나라는 그리 없어. 이유가 뭐겠어?
Q, 그 말에서 선생님 시에 대한 도덕적 정결성이 강하게 느껴지는데요?
음, 반성이지. 시인의 사명으로, 혹은 시인의 자세로 반성하는 거지. 시인은 몸을 낮추는 겸손도 필요하고. 또 나에 대한 기대와 바람에 겸손하고, 우리시대와 어떻게 만나느냐, 어떻게 호소력을 가지느냐를 고민해야지, (시인은 ‘내 농사는 논 밖에서 풍년이고, 논 안에서 흉년입니다..’ 라며 처절한 자기반성을 노래했다. 결벽에 가까운 이러한 자기비판은 그의 시를 더욱 도덕적 정결의 바탕 위에 서게 한다.)
Q. 앞으로 어떤 시를 쓰시고 싶으세요?
늘 폭넓고 불편한 진실을 담은 시를 쓰고 싶어요. 진실은 늘 불편하죠. 시대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 이거든. 예를 들어 자연을 건드리는 일을 보자면. 사람은 늘 자연을 건드리고 싶어하죠. 하지만 그건 자연을 죽이는 일이거든. 결국은 인간을 죽이는 일이고. 인간이 거칠고 광폭한 것은 자연을 죽인 탓이지. 시인은 이런 불편한 진실을 건드리는 것이지. 그러면 건설하고 땅 파는 분들은 나를 얼마나 불편해 하겠어.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쓰고 싶어요.
Q, 일각에서는 선생님이, 오히려 섬진강 사람들과, 섬진강을 미화해서 상품으로 포장했다고 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초기에는 민중의 고통을 노래했지. 하지만 지금까지도 계속 그럴 수만은 없잖아. 고통 속에 아름다운 서정이 있고, 그것을 또 드러내야 할 시인의 의무가 있는데. 섬진강 민중은 고난의 민중이라는 시만 쓸 수는 없지. 섬진강은 오히려 우리가 잃어버린 원형을 닮고 있거든.
Q. 요즘 사회적으로 불행한 죽음들이 많습니다. 시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칩니까?
자기가 사는 삶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지나친 우월감을 갖는 데서 비극이 시작되죠. 보통 ‘무리하다’는 말, ‘지나치다’는 말은 곧 자기만을 생각한다는 뜻이거든. 무리한 것은 곧 지나침이에요.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늘 자신을 가다듬고 고쳐가는 것이 중요하지. 일상을 가까이 하지 못하면 삶이 사라져. 그걸 잃은 거지.
Q. 요사이는 고향집을 떠나 전주에서 사신다는데, 그럴 이유가 있으시나요?
여기는 사람들이 느닷없이 찾아와서 내 생활이 없어. 일 년에 2000~3000명 씩 문학기행을 오는데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이야기하고 맞이해야지, 다들 내 손님인데. 아내가 밥하느라 아주 곤욕을 치러. 그래도 다 좋은데 글 쓰고 책을 읽을 수 없어. 동네사람들에게도 너무 폐가되고. 내가 봉착한 가장 큰 문제였지. 그래서 집을 옮겼는데, 이제 퇴임했으니, 다시 돌아올까 생각 중이야. 지금 어머니가 사시는 이 집 뒤에 새로 작은 집을 하나 달아내든지 하려고 해.
(짚 앞의 강가 징검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멀리선 온 듯한 한 쌍의 젊은이가 멀리서 시인에게 인사를 하며 카메라를 꺼내 들었고, 시인은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아이처럼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Q. 천직이 된 교사도 처음에는 적성이 아니셨다면서요?
교사 한 달하니까 아이들하고 노는 게 죽을 맛이더라고요. 젊을 때 얼마나 갑갑하던지.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부터 세상 보는 눈이 떠지더군요.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내 존재를 생각하게 되고, 그러니 아이들이 좋아졌어요. 애들은 살아 있고, 정신적으로 역동적이에요. 그런 새로움을 보고 생각하죠. 그걸 보고 배우고. 그래서 나는 늘 현실주의자이고 지금을 중시하죠. 아이들 눈빛 동심을 보면 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요. 그러면 교사가 아주 재미가 나요. 교육을 통해 나를 교육하는 거지.
Q. 교사로서의 재미는 가르치는 게 아니라 배우는 거라는 말이군요?
그러면 진심이 통하거든, 그런데 세상은 그게 안 통해. 아이들은 내가 진실한 만큼 진실하죠. 어떤 때는 아이들 노는 게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 없어. 뛰어 놀 공간만 있으면 놀지, 행복한 거야. 지극히 그 순간은, 그걸 보며 밖을 향한 내 욕망이 사그라들어요. 어른들은 이해관계로 늘 이합집산 하지만 아이들은 진실하거든. 그걸 가리키며 내가 배우지.
Q. 산문을 쓰실 계획은 없습니까?
아, 그건 이미 좀 써둔 게 있어요. 한 3권 준비했지. 올 12월과 내년 봄쯤에 낼까 싶어요. 하나는 ‘아이들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라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마침내 그렇게 된 나의 인생’이라는 책이에요.
Q. 선생님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누구였어요?
아무래도 어머니죠. 어머니가 얘기를 잘하셨지. 이를테면 ‘아이들은 싸워야 큰다’ 이런 말. 아주 아름다운 말이거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마찰하고, 그 마찰이 해결되는 과정을 배우는 거잖아. 그걸 통해 이해하고 배우는 거지. 또 ‘우리집 개를 내가 예뻐해야지 남이 예뻐한다’ 이런 말도 철학적 이잖아, 그렇죠?
(보통 사람들이 안경을 쓰면 시인의 눈에는 돋보기와 현미경이 걸린다고 한다. 같은 말도 이렇게 해석하는 시인에게는 세상 모두가 스승일 터이다.)
Q. 어떤 작가를 좋아하세요?
다 좋아하지. 하지만 김수영 시인을 좋아해. 인간적으로 볼 때 그의 시는 치열한 일상과 삶을 담고 있어요.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시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자세를 유지했어. 아직도 우리에게 살아 있는 시인인데. 정말 생명력이 있지. 근본적으로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혁명이거든. 그래서 시인은 인간의 거짓투성이, 고루한 삶을 못 견디고 돌아버리는 거지. 김수영 시인이 그랬어.
Q. 오늘의 선생님을 만든 것은 독서의 힘인데, 선생님에게 독서의 의미입니까?
요즘은 독서하는 사람이 드물어. 독서를 잃어버린 시대지, 특히 대학생들이 책을 놔 버렸어. 하지만 나중에는 책을 읽는 사람만 살아 남을 거야, 책은 정신작용에 영향을 미쳐서 새로운 것을 찾도록 충동질 하거든. 그러면 사람이 변하지. 독서로 정신이 풍요로우면 당당하고 자신만만해져. 비루해지거나 저 자세일 필요가 없지. 누구에게나 말이야.
마치며
‘오! 내게 와서 꽃처럼 피어나는 아이들. 아이들은 나무처럼 자랐다. 세상에 태어나 아이들의 곁에 있게 된 것은 내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감출 수 없는 내 생의 축복이었고, 여한이 없는 날들이었다. 많은 분들의 분에 넘치는 관심과 인정이 나와 아이들에게 햇살처럼 쏟아졌다. 그 사랑이, 그 믿음이, 그 인정이 나를 나무의 새잎처럼 세상으로 밀어 올린다…- 김용택 시집 『나무』중에서
그는 스스로 쓴 이 ‘시인의 말’처럼 행복한 사람이다.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사는 것’ 이라는 로뎅의 말처럼 ‘그는 마음 머물고 눈길 가는 지금, 저곳이, 실감나는 나의 현실이라’고 믿으며 그것을 노래했고 딱 그 노래만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내일도 그곳에 그렇게 있을 터이고 우리 중에 또 누군가는 다시 그곳으로 시인을 찾아 나설 것이다.
박경철 (donodonsu@naver.com),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