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에서 억대 연봉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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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좋은글 작성일2009-09-12 18:33 조회1,07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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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남편을 만난 것은 21살. 순진한 강원도 처녀는 선배를 쫓아간 개척교회에서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났다. 남편은 최 원장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었고, 혼자 가슴앓이를 해오다 청혼한다. 하지만 남편은 하반신을 사용하지 못하는 1급 장애인. 청혼을 받은 최 원장은 무거운 마음에 4달 동안 불면증에 시달려야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혼에 성공, 현재 최 원장 부부에게는 1남 1녀의 자녀가 있다. 최 원장은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어느 날 딸이 '엄마는 왜 장애인이랑 결혼했어?'라고 질문했어요. 그래서 '엄마는 어떤 사람이든 다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아빠가 엄마로 인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결혼했지'라고 대답해 줬어요. 딸은 아직도 제게 '엄마처럼은 못 살겠다'고 말하지만 남편은 아직도 저에게 많은 힘이 되는 존재에요. 항상 제가 무엇을 하던 아낌없는 지원을 보내는 것이 남편의 장점입니다"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구두닦이'의 복수는 '내가 너보다 성공 하겠어'
반대하는 결혼을 한 최 원장은 행복과 별개로 늘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해왔었다. 또 결혼 생활 1년 만에 아이가 생겨 만삭의 몸으로 과일장사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자 장사는 불가능했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시댁과 살림을 합치게 된다. 넉넉하지 못한 시댁 살림은 비닐하우스. 비닐하우스에서 산후조리를 하던 최 원장은 하루아침에 수해로 살던 집까지 잃게 된다. "살던 비닐하우스는 물난리에 떠내려가 버리고 교회에서 살았어요. 공공화장실에서 쌀을 씻고, 사람들이 없는 예배당에 자리를 펴고 잠을 자고…. 그때 쌀을 씻다 화장실 거울을 봤는데, 거울 속엔 너무 초라한 노숙자가 있었어요. 그때의 절망감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어요…" 최 원장 부부는 겨우 집을 구하고 구두닦이로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아이를 업고 장애인 남편과 함께 구두닦이를 하는 그녀에게 사람들은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때 사람들이 저를 무시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분해요. 돈을 던져 주는 손님도 있었고, 대놓고 저에게 장애인 아내라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속으로 저는 '당신보다 몇 년 후에 내가 더 잘 살테니 두고 봐'라는 말을 수없이 했어요. 그때는 제 안에 나쁜 감정들을 좋은 쪽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마음이 오기가 아닐까요." ▶30대, 최일주의 '최고의 순간'…그리고 반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30대 그녀의 인생에 한줄기 빛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구두닦이를 하며 틈틈히 신학을 공부해온 남편이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 최 원장 부부는 공주로 내려가 작은 교회를 세웠다. 파란만장한 부부의 인생 스토리는 교회의 신도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교회는 날이 갈수록 부흥했고, 부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행복도 잠시, 부부는 불행의 사건으로 교회의 문을 닫게 되고 생계를 위해 작은 팬시점을 인수해 운영에 나선다. 하지만 세상물정 몰랐던 목회자 부부에게 장사란 쉽지 않았을 터. 설상가상으로 교회를 닫은 후 남편의 방황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매일매일 술을 마셨어요. 저는 매일 둘째를 등에 업고 술에 취한 남편을 찾아 다녔어요. 하루는 가게 물건을 사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지방에 다녀왔는데, 남편이 술에 잔뜩 취해 자고 있더라구요. 그때 정말 남편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어요. 그리고 바로 너무 놀랐어요. 저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 이미 죄인이었거든요…." 이후 원장은, 이후 가게를 정리하고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식당일을 전전하다 보험설계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보험설계사 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입사 후 3개월 동안 그녀는 계약을 성사 시키기는 커녕 부끄러움에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을 이겨내고, 당당히 보험설계사로 자리잡는데 성공한다. ▶보험 설계사…7만원짜리 발품 강사에서 억대 강사까지 최 원장의 강의 경력은 7년. 지금 그녀는 국내에 몇 안되는 억대 강사로 활동 중이다.
이 강연을 계기로 그녀는 오랜 꿈이였던 강사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보험회사를 그만 두고 그녀가 강연을 처음 시작한 것은 2004년. 그녀의 강연은 일부에게 이미 입소문이 나있었지만, 시장에 알려지기까지는 남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처음 강연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는데, 아무도 절 찾아주질 않더라구요. 그래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홍보를 시작했어요. 한번 거부당했다고 끝내지 않았어요. 계속 전화하고 또 찾아가 인사하고…. 그런 일을 몇 달 동안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회가 늘어났어요" 그녀의 첫 강의료는 7만원 남짓. 지금 그녀의 강의료는 300만원 선이다. 억대 강사로 활동하는 중에도 그녀는 빠지지 않고 찾는 곳이 한 곳 있다. 그 곳은 바로 교도소. 교도소의 강의료는 4만원이다. 교통비와 이동시간 등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돈을 내가면서 강의를 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녀는 본격적으로 강의를 하기 전부터 교도소 교육을 해왔다. 최원장은 교도소 강연에 대해 '자신에 대한 벌'이라고 전했다. 남편에 대한 나쁜 마음을 먹고 난 뒤 시작된 교도소 강연은 벌써 7년째 이어지고 있다. "제가 굶어도 보고 노숙도 해보니, 인간으로 태어나 기초적인 것이 해결되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어요. 그래서 교도소에 계신 분들의 사연이 더 남다르게 느껴져요. 실제로 교도소에 계신 많은 분들이 갈 곳이 없어요.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되기도 하죠. 이런 분들을 위한 수용시설을 만드는 것이 제 꿈이기도 합니다." ▶강사 최일주, 그리고 다시 '꿈' 강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최 원장은 유달리 생기가 넘친다. 그녀는 자신의 일에 대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일이 너무 재미있어요"라고 덧붙였다. 강연에 대해 소개해달라는 기자의 말에 그녀는 "저는 정말 강의에 자신있어요. 특히 사람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에 너무 흥미를 느껴요. 저는 강의를 시작 할 때마다 '이 강의가 마지막 강의다' 라고 생각해요. 일도 사랑도 모든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순간에 열정을 더할수 있거든요"라며 "또 저는 항상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제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제 시신 앞에서 '그분이 나에게 구세주였는데'라면서 안타까워했으면 좋겠어요"라고 전했다. 그녀는 강사의 꿈을 이뤄낸 후에도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인터넷 라디오 방송 DJ를 맡기도 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구상 중이기도 하다. 또 유난히 글쓰기를 좋아하는 그녀는 최근 그녀의 일대기를 담은 책 '당신이 이기기 전에는 끝이 아니다(도서출판 서돌)'을 발간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그녀는 "제가 너무 좋아하는 강연은 물론 계속할 계획이에요. 그리고 시련에 빠진 어려운 이들을 위한 특별 교육프로그램도 계획 중이에요. 또 예쁜 사랑 소설을 써 보려구요"라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최일주 원장은 인터뷰를 마치며 "저는 항상 힘든 시간을 보내며 '내년 이 맘때는 지금 이 고통은 없다. 고통은 계절이 바뀌듯 지나가기 마련이다'라며 스스로를 다독여왔어요. 힘든 시절을 보내고 계신 많은 분들도 계절에 변화에만 민감하지 말고 희망을 붙잡는 메시지에 민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힘든 시간을 겪고 나서 '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저는 항상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들을 잊지 않고 꿈꿔왔거든요. 힘들고 아픈 시간들은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란 걸 잊지 마세요. 어려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누구나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전했다. 뉴스팀 정원진 기자 aile02@hankyung.com / 사진 양지웅 기자 yangdoo@hankyu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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